불탄 배터리에 휘청이는 국가…‘디지털 안전망’ 기본부터 [취재진담]

불탄 배터리에 휘청이는 국가…‘디지털 안전망’ 기본부터 [취재진담]

기사승인 2025-09-30 12:09:38
29일 오전 대전 유성구 국가정보자원관리원(국정자원) 화재 현장에서 경찰과 소방 관계자 등의 화재 정밀 감식이 진행되고 있다. 연합뉴스 제공

26일 밤, 대전 국가정보자원관리원(국정자원) 전산실에서 튄 하나의 불꽃이 대한민국 정부의 디지털 심장을 멈춰 세웠다. 무정전 전원장치(UPS)용 리튬이온 배터리 분리 작업 중 스파크가 발생했고, 이내 전산실 온도는 160도까지 치솟았다. 배터리 384개가 열 폭주로 타오르며 서버 740대를 삼켰고, 647개의 정부 시스템이 한꺼번에 멈췄다. 

주민등록, 정부24, 우체국 금융, 모바일 신분증까지 ‘디지털 정부’의 일상이 한순간에 종이 행정으로 되돌아간 순간이었다. 정부는 “직접 피해를 입은 96개 시스템 외 551개는 순차적으로 복구하겠다”고 발표했지만, 화재 발생 나흘째인 29일 정오 기준 복구율은 9.6%에 그쳤다. ‘3시간 이내 복구’라는 구호는 허상으로 드러났다.

이번 사태는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 예견된 인재다. 2014년 설치돼 보증기간을 넘긴 노후 배터리, 하도급과 아르바이트 인력이 뒤섞인 핵심 작업, 국제 권고(90cm)를 무시한 60cm의 아슬아슬한 간격, 불연성 차단벽조차 없는 전산실. 지켜야할 ‘기본’을 무시한 정황이 실타래처럼 풀려나왔다.

감사원은 2023년 전산망 마비 사태 이후 국정자원의 노후 장비 관리·관제·예산 부실을 지적했다. 고장률이 급증해도 내용연수(교체 가능할 때까지의 최소 사용기간)를 늘려 교체를 미뤘다. 공통 인프라는 ‘주인 없는 장비’ 취급을 받으며 예산에서 후순위로 밀렸고, 장애 알림도 무시됐다. 골든타임은 허망하게 지나가고 말았다. 경고가 있었고, 시간도 충분했지만 바뀐 건 없었다.

더 뼈아픈 건 재난을 막겠다며 1500억원을 들여 마련한 백업센터가 사실상 무용지물이었다는 점이다. 정부는 2008년부터 전자기파, 지진, 폭격에 견딜 수 있는 재해복구용 데이터센터를 충남 공주에 지었고, 2023년 완공했다. 그러나 예산이 깎이면서 핵심 기능인 능동형 재해복구(DR) 체계는 미완에 머물렀으며, 비상 시 즉각적 서비스 전환이 불가능했다. 

반면 민간은 실패에서 교훈을 얻었다. 2022년 SK C&C 판교 데이터센터 화재 이후 통신사와 정보기술(IT) 기업들은 삼중화, 가용영역 분산, 소화 시스템 고도화에 수천억원을 투자했다. 그러나 정부는 2023년에도, 또 이번에도 노후 장비, 부실한 관리, 재해복구 미비라는 같은 실수를 되풀이했다. ‘디지털 강국’이라는 구호와 현황 사이의 간극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이번 화재가 던지는 질문은 명료하다. “전산실에서 튄 불꽃으로 인해 시스템 전체가 멈추는 나라를 디지털 강국이라 부를 수 있는가?”

국가 디지털 자산은 ‘선택’이 아닌 ‘생존 인프라’다. 단 하루라도 멈추면 행정이 마비되고, 국민의 일상은 멈춘다. 그런 시스템이 10년 넘은 배터리와 하도급 인력에 의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강국의 조건은 화려한 서비스가 아니다. 지루할 만큼 단단한 ‘기본기’다. 배터리 한 팩의 연식, 케이블 한 줄의 절연, 장애 알림 한 건을 놓치지 않는 것. ‘디지털 강국’이라는 말이 더는 잿더미 위에 쓰이지 않으려면, 기본부터 되짚어야 한다.
이혜민 기자
hyem@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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