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로벌 메모리반도체 3위 기업인 미국 ‘마이크론’이 중국 내 데이터센터용 메모리칩 공급을 중단하고, 대만과 일본을 중심으로 고대역폭메모리(HBM) 생산거점 확대에 나섰다. 국내 업계는 이번 조치를 ‘점유율 확대’의 기회인 동시에 ‘인재 유출’의 위험이 공존하는 상황으로 평가하고 있다.
21일 로이터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마이크론은 최근 중국 내 데이터센터용 D램 등 고부가칩 공급을 전면 중단하기로 했다. 2023년 중국 정부가 “마이크론 제품에 심각한 보안 문제가 있다”며 중국 핵심 인프라에서 사용을 금지한 이후 수익성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실제로 2022년 전체 매출의 25%를 차지하던 중국 사업 비중은 올해 12%까지 떨어졌다. 이에 따라 마이크론은 장쑤성 일대 생산기지를 정리하고, 현지 인력 수백 명을 해고했다. 모바일용 낸드플래시 개발도 중단했다.
다만 중국 시장에서 완전히 철수하는 것은 아니다. 레노버 등 중국 주요 고객사가 해외에 보유한 데이터센터에는 계속 메모리 공급을 유지하고, 중국 내 자동차·모바일 업체 대상 납품도 일부 유지한다.
타이중·히로시마에 HBM 거점 구축…한국 인력 영입 사활
중국 사업 축소와 동시에, 마이크론은 HBM 생산 역량 강화를 위한 글로벌 재편에 속도를 내고 있다.
2023년 개소한 대만 타이중 제4공장은 세계 최초로 HBM3E(5세대) 양산에 성공한 기지로, DRAM 다이 생산부터 적층 패키징까지 이뤄지는 마이크론의 핵심 HBM 허브다. 일본 히로시마에는 신규 DRAM 공장을 건설 중으로, 일본 정부는 이 프로젝트에 최대 5360억 엔(한화 약 3조6000억원) 규모의 보조금을 지원하기로 했다.
마이크론의 철수는 국내 기업에 시장 확대의 기회로 작용할 전망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시안·우시·다롄 등 현지 생산기지를 바탕으로 반사이익을 기대할 수 있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2025년 삼성전자의 낸드 생산량 중 최대 35%, SK하이닉스의 D램 생산량 중 약 40%가 중국에서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의 지난해 데이터센터 투자 규모는 약 5조원으로, 마이크론의 빈자리를 한국 기업들이 메울 수 있다는 전망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중국 메모리 시장 재편은 한국 기업들에 단기적으론 수혜일 수밖에 없다”며 “미·중 갈등에 따라 미국 기업이 빠진 자리를 우리가 채울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동시에 업계는 인재 유출 우려를 크게 보고 있다. 마이크론이 글로벌 생산망 확장을 추진하며 한국 반도체 엔지니어 영입에 적극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업계에 따르면, 마이크론은 링크드인 등 글로벌 인맥 네트워크를 통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메모리 엔지니어들에게 직접 러브콜을 보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대상은 HBM 및 패키징 경력자들로, 연봉 10~20% 인상에 더해 일부는 2억원 이상 억대 연봉, 비자 및 거주비 지원, 판교 호텔 면접, 대학 캠퍼스 설명회까지 진행하며 구인에 나선 상태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마이크론이 타이중 HBM 라인 가동을 위해 한국 인력을 적극 유치하는 것으로 보인다”며 “기술 격차를 줄이기 위한 인력 보강 전략”이라고 설명했다. 마이크론은 HBM 시장에서 삼성·SK하이닉스에 비해 상대적으로 후발주자이기 때문에, 단기간 전력 보강을 위해 숙련 인력을 흡수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패키징·회로설계 등 특정 분야 수요가 뚜렷하며, 대부분 타이중 HBM 라인과 연결돼 있다”고 설명했다.
국내 반도체 기업들은 인재 유출 방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유능한 직원의 이직을 막기 위해 기업 문화를 개선하고 성과급·특별보상 등을 늘리는 한편, 핵심 개발자들에게는 파격 대우를 제시하며 붙잡기에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다.
그럼에도 업계 내부에선 "상위 몇몇 핵심 인력을 제외한 대다수 직원의 이탈을 일일이 막기 어렵다"는 현실론이 나온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요즘 젊은 엔지니어들은 글로벌 경험과 처우 개선을 중시한다”며 “우리가 키운 인재를 외국 기업이 데려간다는 자조가 현장에 퍼져 있다”고 말했다.
업계는 정부의 전략 부재를 지적한다. 반도체 초강국을 표방하며 수십조 원의 예산을 투입했지만, 정작 ‘사람’에 대한 대응은 느리고 부족하다는 것이다.
정부는 지난 8월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주도로 인재 유출 방지·우수 인재 유치를 위한 범정부 TF를 출범시켰다. 그러나 정책 실효성과 예산은 여전히 부족하다는 평가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 교수는 “결국 사람이 핵심 경쟁력인데, 정부 지원은 여전히 시설·장비나 단기 성과에 집중되어 있다”며 “인재 유출을 국가 안보 차원에서 다룰 컨트롤타워와 종합대책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