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헌법재판소가 형법상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지 6년이 넘었지만, 입법 공백 상태가 이어지면서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여성과 의료 현장의 혼란은 가중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낙태죄를 완전히 폐지하고 이를 의료 행위의 일부로 다루는 캐나다를 포함한 해외 사례를 연구한 보고서가 나와 주목된다.
보건복지부와 한국모자보건학회는 21일 ‘해외사례 비교를 통한 인공임신중절 정책연구’ 보고서를 발간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주요국들은 이미 인공임신중절을 처벌의 영역이 아닌 여성의 건강권과 자기 결정권을 보장하는 보건의료 서비스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프랑스의 경우 14주까지 여성의 요청에 따라 임신중절을 허용하고 모든 비용을 건강보험으로 지원한다. 독일은 원칙적으로 불법이지만 임신 12주 이내에 지정된 기관에서 상담 받으면 처벌하지 않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캐나다는 1988년 낙태죄를 완전히 폐지하고 이를 의료 행위의 일부로 다룬다.
이들 국가는 공통적으로 단순히 허용 여부를 넘어 안전한 시술 환경을 보장하고, 여성들이 충분한 정보를 바탕으로 신중한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돕는 체계적인 상담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보고서는 국내 전문가 및 일반 국민 4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도 담고 있다. 여기서 인공임신중절 문제 해결을 위해 국가가 지원해야 할 정책 1순위로 남녀 모두 ‘출산·양육에 대한 사회경제적 지원’(34.3%)을 꼽았다는 점이 가장 눈에 띈다.
뒤를 이어 ‘피임·임신·출산에 대한 남녀 공동책임 의식 강화’가 처벌이나 규제에 앞서 원치 않는 임신 자체를 예방하고, 임신과 출산은 여성 혼자가 아닌 사회 전체와 남성의 책임이라는 인식이 확산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전문가들은 세부적인 방안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제시했다. 산부인과 전문의 대다수는 여성의 요청에 의한 임신중절 허용 주수를 의학적 안전성을 고려해 ‘임신 10주 이전’으로 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또 약물을 이용한 인공임신중절은 반드시 의사의 처방과 관리 감독하에 이뤄져야 하며(86.3%), 시술 역시 산부인과 의사가 시행해야 한다(82.3%)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의사의 개인적 신념에 따른 진료 거부권은 인정해야 한다는 응답도 절반을 넘었다.
보고서는 처벌만능주의에서 벗어나 여성의 자기 결정권과 태아의 생명권을 조화시키기 위한 현실적인 대안 마련이 시급하다고 강조한다.
이를 위해 의학적 근거에 기반을 둔 허용 임신 주수 설정, 가치중립적 정보를 제공하는 전문 상담 시스템 구축 및 의무화, 안전한 약물 사용 및 관리 체계 마련, 출산·양육에 대한 실질적인 국가 지원 확대 등 포괄적인 정책 설계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