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의 보건의료체계가 의사 인력의 불균형, 왜곡된 의료전달체계, 불공정한 보상 구조라는 ‘삼중고’에 직면해 있다는 국책연구기관의 분석이 나왔다. 이를 방치할 경우 필수의료와 지역의료 시스템 붕괴라는 연쇄적 위기에 맞닥뜨릴 수 있다는 지적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26일 ‘국민 중심 의료개혁 추진방안에 관한 연구’ 보고서를 통해 국내 보건의료가 개별적 문제가 아닌 여러 위기가 중첩된 복합 위기 상황에 놓여 있다고 진단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의료 인력의 극심한 불균형이다. 2024년 상반기 전공의 1년차 충원율을 보면 소아청소년과는 26.2%, 심장혈관흉부외과는 38.1%에 불과했다. 반면 피부과·안과·성형외과 등 이른바 인기과는 100% 충원율을 기록했다.
지역 간 의료 격차도 심각하다. 수도권의 필수의료 전문의 수는 인구 1000명당 1.86명인데 비해 비수도권은 0.46명에 그쳐 4배 이상의 차이를 보였다. 왜곡된 의료전달체계 역시 문제다. 중증·희귀질환 진료에 집중해야 할 상급종합병원들이 경증 외래환자로 북적이며 기능이 마비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상급종합병원의 외래 급여비 점유율은 2019년 9.8%에서 2023년 14.6%로 급증했다.
연구진은 이 같은 위기의 근본 원인으로 행위별 수가제 기반 보상체계를 꼽았다. 국내 수가제도는 진찰료, 검사료, 처치료, 입원료 등 모든 개별 의료 행위마다 단가를 정해 지불하는 행위별 수가제를 근간으로 한다. 행위별 수가제는 지불의 정확성이 높다는 장점이 있지만, 의료 행위가 많을수록 수익이 증가하는 구조 탓에 재정을 낭비하고 이른바 ‘3분 진료’나 과잉 진료·검사를 부추긴다는 지적이 있었다. 실제 설문조사에서 의사들이 필수의료를 기피하는 가장 큰 이유로 ‘노력 대비 낮은 경제적 보상’(31%)을 꼽았다.
결국 인력, 전달체계, 보상 구조 문제가 맞물리며 필수의료 공백과 지역의료 붕괴라는 총체적 위기를 낳고 있다는 것이 보고서의 결론이다. 이에 연구진은 부모가 밤중에 아이가 아플 때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해하지 않도록 ‘24시간 의료이용 지원 서비스’를 도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영국 NHS(National Health Service)처럼 전화나 앱을 통해 환자의 상태를 확인하고, 24시간 언제든 가장 적절한 병원으로 안내하는 ‘의료 길잡이(내비게이터)’ 시스템을 구축하자는 것이다.
다음으로 의료비·간병비 부담 완화를 위해 ‘간병 국가 동행제’와 ‘의료비 안심보장체계’ 도입을 제안했다. 급성기 병원의 간병 서비스를 국가가 책임지는 형태로 확대하고, 비급여 진료와 실손보험을 체계적으로 관리해 가계 부담을 줄이자는 방안이다.
아울러 병원 중심 치료를 넘어 퇴원 후 집에서 회복과 재활을 돕는 ‘아급성기 의료’, ‘재택의료’, ‘원격의료’를 활성화해 환자 곁으로 의료가 찾아가는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고 제언했다.
연구진은 “한국 의료는 시스템 전체를 위협하는 복합 위기 상황에 놓여 있다”며 “국민이 일상에서 변화를 체감할 수 있는 서비스 개편과 과감한 제도 혁신이 시급하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