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가 추진하는 금융회사의 보이스피싱 ‘무과실 배상책임’과 관련해 “법리적으로 위법하다”는 논란이 불거졌다. 정부는 보이스피싱 피해 구제를 위해 연내 입법을 목표로 하고 있어 적잖은 진통이 예상된다.
4일 금융권에 따르면 금융당국은 피해자가 보이스피싱 범죄에 속아 자금을 직접 송금했더라도 금융회사가 전액 또는 일부를 배상하도록 하는 제도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이와 함께 금융사가 보이스피싱 예방 및 대응을 위해 전담부서를 의무적으로 설치하고 전문 인력을 배치하도록 규정할 예정이다. 또한 금융감독원이 보이스피싱 피해가 집중된 금융사의 대응 역량을 평가하고 개선을 요청할 수 있도록 점검 체계를 만들기로 했다.
당국이 금융사의 책임을 강화하고 나선 것은 각종 예방 노력에도 피해 규모가 계속해서 급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찰에 따르면 올해 들어 7월까지 보이스피싱 범죄 피해액은 약 7766억원으로, 지난해에 비해 2배로 늘었다. 특히 고도화되는 보이스피싱 수법에 개인이 대응하기엔 한계가 있다는 판단도 작용했다. 금융위는 “AI 기반 수법이 고도화해 개인 주의만으로는 대응이 불가능하다”며 “전문성과 인프라를 갖춘 금융사가 보다 체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설명했다.
다만 이를 법제화하는 과정에서 ‘위법 논란’이 커질 전망이다. 국민의힘 이헌승 의원이 금감원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은행연합회가 최근 의뢰한 자문용역에서 보이스피싱 무과실 배상책임 제도 도입이 위법하다는 결론이 나온 것으로 드러났다.
자문 결과 우선 국내 법체계 및 금융환경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보이스피싱은 비대면 범죄가 주를 이루는데, 금융회사가 단순한 의심만으로 거래를 거절하기 어렵고, 통신사·금융기관·수사기관·정부가 각각 책임을 나누어야 하는 상황에서 모든 책임을 금융기관에 지우는 것은 민사소송법상 ‘과실책임주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또한 금융소비자의 고의·중과실 여부 입증과 관련해서는 △범죄자와 피해자 간의 통화 내용, 피해자의 금융 지식수준 등 주관적이고 내부적인 사실을 금융기관이 증명하기 어렵고, △일괄적인 무과실 배상책임을 법제화할 경우 피해자의 도덕적 해이와 보이스피싱 범죄 증가 우려가 있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해외 주요국 사례 역시 전면적인 무과실 배상을 인정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헌승 의원은 “보이스피싱 피해의 심각성은 충분히 공감하지만, 법리적 원칙과 제도적 정합성을 무시한 채 모든 책임을 금융기관에 전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피해자 보호를 위해 통신사·수사기관·정부 등 각 기관이 제 역할을 다 할 수 있도록 체계적 대응 체계를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제도 도입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던 금융권도 난간하다는 입장이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피해자 구제 필요성에는 동의하지만, 금융사에는 주주 보호 의무도 있다”며 “위법 소지를 해소할 제도적 보완 장치가 반드시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