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이 형법상 배임죄를 폐지하기로 했다. 기업의 정상적 경영 판단을 범죄로 몰아 경영 활동을 위축시킨다는 비판을 받아 온 배임죄가 도입 72년 만에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와 함께 이미 재판이 진행 중인 배임죄 혐의 사건들의 면소 여부가 향후 핵심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4일 정부는 배임죄 폐지로 생길 법·제도 공백을 메우기 위한 대체 입법 마련에 착수했다.
배임죄는 타인의 사무를 맡은 사람이 의무를 저버려 상대방에게 손해를 끼치는 행위를 뜻한다. 형법, 상법,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 등에 규정돼 있으나, 정부가 이번에 폐지하려는 것은 형법 제356조다.
형법상 배임죄는 경영진이나 임직원이 회사에 손실을 입히며 사익을 취하거나 영업 비밀을 유출하는 경우, 부동산 이중 매매 등에 주로 적용돼 왔다. 하지만 구성 요건이 모호하고 적용 범위가 넓어 수사기관과 법원의 자의적 판단을 낳는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기업 활동뿐 아니라 민사 영역까지 확대 적용돼 경영 위축을 초래한다는 이유로 재계의 숙원 과제로 꼽혀 왔다.
이재명 대통령도 지난 7월30일 “한국에서는 기업 경영을 하다 잘못하면 감옥에 갈 수도 있어, 국내 투자를 꺼리는 사례가 있다”며 배임죄 완화와 경제형벌 합리화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에 정부는 지난달부터 배임죄 관련 1심 선고 판례 3300건을 분석하며 폐지 여부 검토했다.
야권은 당정의 배임죄 폐지 방침을 두고 “이재명 구하기 꼼수”라며 반발했다. 배임죄가 사라지면 기업인·정치인 연루 사건이 대거 면소로 종결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면소란 해당 법 조항이 폐지돼 소송 요건이 사라지면 판결 없이 사건이 끝나는 것을 뜻한다. 이 대통령 역시 대장동 개발 비리와 관련해 배임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송언석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배임죄 폐지가 관철되면 특검 수사가 모두 무효가 된다”며 “민주당의 입법 독주가 부메랑이 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한동훈 전 대표도 “민주당은 반기업 정서를 정치적으로 이용해 왔다. 노란봉투법을 통과시키고 배임죄까지 없애려는 것은 이 대통령을 위한 것”이라며 “진정 아니라면 부칙에 ‘이 법 시행 이전의 행위에는 적용하지 않는다’는 조항을 넣으라”고 지적했다.

민주당은 국민의힘의 주장을 악의적 선동이라며 반박하는 한편 배임죄 폐지 마무리 절차에 박차를 가하겠다는 방침이다.
김현정 민주당 원내대변인은 “국민의힘이 갑자기 이 대통령을 소환해 마치 이 대통령의 재판 면소를 위해 배임죄를 폐지하려 한다는 프레임을 짠다”라며 “반대를 위한 반대이고 언어도단이자 적반하장”이라고 말했다.
김영진 민주당 의원도 “이 대통령의 배임죄 혐의는 그것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특가법상 뇌물이나 제3자 뇌물 등 많은 부분이 중첩돼 있다. 면소와 관련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반박했다.
민주당은 배임죄 폐지 대체 입법으로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 등을 강조하고 있다. 배임죄 폐지로 형사적 수사 근거가 사라지게 되면 민사 소송 체계에서 증거 확보 장치를 강화해 공백을 매우자는 것이다. 디스커버리 제도는 재판에 앞서 소송 당사자가 상대방이나 제3자에게 증거·자료·정보 공개를 요구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다.
김남근 민주당 의원은 “우리 법 체계상 원고가 기업 내부정보를 확보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해관계자들이 수사기관에 의존하는 관행이 굳어졌다”며 “민사 중심 구조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원고가 기업 내부 정보를 확보할 수 있도록 제도가 보완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한편 민주당은 이르면 올해 정기국회에서 배임죄 폐지와 보완 입법을 마무리한다는 계획이다. 다만 법무부가 판례 검토와 법안 작업을 폭넓게 진행 중인 만큼 처리 시점이 늦춰질 가능성도 제기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