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는 들라크루아의 영향을 많이 받은 아카데미 스위스에서 그림을 배워 초기작들은 낭만주의적인 색채가 짙게 풍긴다.
나르시시즘에 빠진 자화상 <검은 개를 데리고 있는 쿠르베>로 살롱에 입선을 한 뒤, 미남에다 돈도 많고 그림 실력도 뛰어난 쿠르베는 자신만만하였다. 6년만에 낭만주의 화풍에서 벗어난 쿠르베는 그의 이름을 미술사에 각인 시키는 <오르낭의 매장>으로 파리를 놀라게 만들었다.
서른 살이 된 그는 1850~51년 살롱에 세 점의 대형 캔버스를 출품했으며, 모두 오르낭 지역의 일상적인 삶을 주제로 삼았다. 그중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은 <오르낭의 장례식에 있었던 역사적인 인물들의 그림 Tableau de figures humaines, historique d’un enterrement a Ornans>이라는 긴 제목을 가진 대작으로, 이는 회화의 혁신적인 전환을 상징한다.
쿠르베는 평범한 시골 사람들의 장례식을 역사적 사건처럼 묘사함으로써, 프랑스 회화에서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장르의 위계질서를 과감히 무너뜨렸다.

화폭 왼쪽부터 자세히 살펴보자. 검은 옷을 입고 모자를 쓴 이들이 관을 운구하고 있다. 십자가가 새겨진 흰 천으로 관은 완전히 덥혀 있고, 배경에는 쿠르베의 고향인 오르낭의 백악 절벽이 보인다.

스운구인들 옆에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관람자와 시선이 마주치는 십자가를 든 사람과 복사들이 있다. 앞에 선 소년은 향로를 들고, 다른 소년은 촛대를 들고 있는데 운구하는 남자와 눈을 마주치며 무척이나 지루한 모양이다.
쿠르베는 마을사람들을 작업실에서 한 명씩 모델을 세우며 거의 7미터에 달하는 캔버스에 40여명을 실물 크기로 그렸다.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평범한 이의 장례식을 이렇게 거대한 캔버스에 따분하게 그렸다는 사실 자체가 몹시 황당한 일이었다.
그리스 출신의 화가 엘 그레코(El Greco)가 스페인의 산토 토메 교회를 위해 그린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처럼, 이는 성서나 신화 속 인물들에게만 허락된 특권이었다. 중세 도시인 톨레도의 자그마한 산토 토메 교회를 들어서면 오른쪽에 크고 어두운 그림이 나타난다.

이 작품은 세로로 길고 둥근 캔버스에 그려졌다. 이는 고딕 스타일로 이야기의 전개에 따라 하단의 지상과 상단의 천상 세계를 동시에 묘사하기 때문이다.
톨레도 지방의 귀족으로 카스티야 왕국의 수석 공증인을 지낸 기사 오르가스 백작은 1323년 사망하며 교회에 큰 재산을 물려주었다. 그런데 후손들이 백작의 유언을 집행하지 않자, 교회는 소송을 벌이고 승소하여 기증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백작에게 감사한 마음을 담아 약 263년 뒤인, 1586년 교회 사제 안드레스 루네스(Andres Nunez)가 이 작품을 엘 그레코에게 의뢰하였다.
지상에는 모자를 쓰지 않은 부제 성 스테파노와 모자를 쓴 주교복 차림의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오르가스 마을의 영주인 곤잘로 루이즈 데 톨레도(Gonzalo Ruiz de Toledo)를 매장하고 있다.
성 스테파노는 돌에 맞아 순교한 성인으로 그 광경이 금색으로 수놓아진 화려한 옷에 그려져 있다. 그 뒤로는 검은 옷을 입고 러프 칼라를 두른 삐쩍 마른 조문객들이 열에 들뜬 표정과 떨리는 손, 촉촉이 젖은 눈으로 장례식에 참관하고 있다. 이들은 틴토레토(Tintoretto)와 야코프 바사노(Jacopo Bassano)가 사용한 마법 같은 빛과 매너리즘으로 뒤틀린 몸을 하고 있으며, 반종교 개혁에 앞장선 인물들이다. 당시 스페인은 식민지에서 막대한 금은보화를 들여와 성당과 수도원을 짓는데 돈을 낭비했기 때문에 귀족들조차 굶주리고 있었다.
서슬 퍼런 종교재판이 횡행하는 데 불만을 가진 이들이 가혹한 현실을 벗어나는 방법은 돈키호테처럼 환상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길이었다. 그래서인지 엘 그레코는 무척 현대적인 미감을 보여주는 걸작을 남겼다. 반종교개혁은 17세기 스페인 문학의 황금시대의 전주곡이었다.
번쩍이는 갑옷을 벗고 허리만 가린 오르가스 백작이 구름을 타고 올라왔다. 그는 성모, 그 뒤에서 열쇠를 가진 노란 옷을 입은 성 베드로, 세례자 요한 등 성인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 보라와 주황의 옷을 입은 세례자 요한 뒤에 노란 천으로 무릎을 가린 검은 수염의 펠리페 2세의 얼굴이 보인다. 엘 그레코는 까다롭고 냉정한 군주에게 아부하기 위해 그려 넣었다. 중심에는 흰 옷을 입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 엘 그레코는 로마에서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을 심도 있게 연구했기에 그것을 연상시킨다.
지상과 천상의 중간에 연두색 옷을 입은 천사가 백작의 작은 영혼을 품고 하늘로 올라가고 있다. 이는 엘 그레코가 크레타 섬에서 보낸 시절에 배운 비잔틴 이콘(ikon)의 전형이다. 그는 지상과 천상의 차이를 강조하기 위해 빛과 색채, 인물들의 비율, 붓질의 밀도 등 가능한 모든 수단을 사용하였다. 지상의 인물들은 조각처럼 견고하게 그렸다면 천상에 운집한 성인들은 서서히 흐릿해 지며 사라지도록 신비하게 묘사했다.
왼편 아래에서 긴 횃불을 들고 무릎을 꿇고 있는 소년은 화가의 아들 호르헤 마누엘 테오토쿠플루스(Jorge Manuel Theotokopoulos)로 자신이 태어난 1578년이라 쓰여진 숫자가 검은 옷자락에 쓰여 있다. 마누엘은 관람자와 시선을 마주치며 손가락으로 백작을 가리키고 있다. 이는 관람객과 직접적인 관계를 형성하며 주제에 집중하게 만든다.
오른편에 투명한 성직자들의 소매가 넓은 중백의(中白衣)를 입고 있는 이는 주문자이다. 이 중백의 사이로 검은 사제복이 비치는 표현은 대가의 기량을 보여준다. 다른 이들은 모두 매장에 집중하고, 사제만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이 그림은 사제가 막대한 재산을 기부한 오르가스 백작이 천국에서 환영(歡迎)을 받는다는 기적을 이미지화 한 작품이다. 이는 사제에게만 보이는 환영(幻影)이었다.
이 작품을 대면한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인간이란 지구에서 짧은 생을 보낸 후 내세로 나아가는 죄 많은 타락한 생명체’라고 생각하며 주머니를 열게 되었을까? 생전에 산토 토메 교회에 재정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오르가스 백작은 죽어서도 영원히 그림 속에 살아남아 입장료 수입을 보장해 주고 있다.

무덤을 판 인부는 무릎을 꿇고 신부를 바라보고, 신부는 성경을 펼치며 적절한 기도문을 찾고 있다. 그들 뒤에는 옷만큼이나 붉은 얼굴로 비평가들을 폭소하게 만든 두 명의 수도사들이 있다.
쿠르베는 ‘사실주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회화 기법에도 과감한 변화를 시도했다. 인물의 피부색과 직물, 흙, 석회암 절벽 등 다양한 재질의 표현은 두터운 물감 층 위에 붓과 팔레트 나이프를 활용해 거칠고 생생하게 구현되었다. 특히 짙은 검은색을 사용해 시각적으로 강렬한 질감을 드러내는 방식은, 매끄러운 표면과 투명한 유약을 중시하던 전통적 회화 기법과는 분명한 결별을 의미한다.
이러한 기법은 단순한 기술적 선택을 넘어, 기존 회화 관습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이었다. “나에게 천사를 보여주면 천사를 그리겠다”라고 선언한 쿠르베였다. 그 대표작인 <오르낭의 장례식>은 평범한 사람들의 장례식을 대형 캔버스에 담아내며, 쿠르베가 파리 예술계에서 자신이 꿈꾸던 위치를 강렬하고도 독창적인 방식으로 천명한 작품이다.

장례식에서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슬퍼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장례식에 따라온 개조차 화면 밖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다. <오르낭의 장례식>을 마주한 비평가들은, 마을 사람들과 강제로 시선을 맞추게 된 데서 오는 불편함을 감추지 못했다.

쿠르베의 회화는 언제나 표면 너머에 복잡한 의미를 품고 있으며, 이는 그가 포착한 현실의 다층성과도 맞닿아 있다. <오르낭의 장례식>은 사실주의의 선언으로 평가받지만, 동시에 고전적 형식에서 영감을 받은 흔적도 엿보인다. 특히 쿠르베가 네덜란드 여행 중 접한 대형 집단 초상화는 이 작품의 구도와 분위기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쿠르베는 대가인 엘 그레코의 고전을 변형시켜 새로운 걸작을 만들었다.

최금희 작가는 미술에 대한 열정으로 전 세계 미술관과 박물관을 답사하며 수집한 방대한 자료와 직접 촬영한 사진을 가지고 미술 사조, 동료 화가, 사랑 등 숨겨진 이야기를 문학, 영화, 역사, 음악을 바탕으로 소개할 예정이다. 현재 서울시50플러스센터 등에서 서양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